[강원/양양] 푸른산 푸른바다, 중생의 마음 쓰다듬는 관음성지 낙산사 (의상대, 홍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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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의 줄기가 바다로 뻗은 오봉산(五峰山)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낙산사. 1300년의 역사를 지닌 낙산사는 남해의 보리암,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불리고 있다.

바다를 향해 단정히 자리 잡은 가람(伽藍)들은 세속에 찌든 내방객을 차분히 어루만져주며 화마의 폐허는 흔적도 없이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의상대사가 오봉산에 상주하는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창건(671년)하였다는 낙산사.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공부한 뒤 돌아왔을 때, 대비진선(大悲眞身, 관음보살)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불렀다. 서역에서는 보타낙가산((寶洛洛伽山)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 지은 것이다.

의상이 이곳에서 수행한 지 7일 만에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수정염주 한 벌과 여의보주 한 벌을 주었다. 그리고 관음보살 진용(眞容)이 나타나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典)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라고 하자 이곳에 절을 짓고 낙산사라 부르고는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의상법사는 말없이 떠나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천년고찰 낙산사는 수없는 외세의 침입으로 성보들은 강탈당하고 전각들은 화재에 휩싸이면서 전소와 중건을 반복하는 아픔의 역사로 이어져왔다.

빈일루와 응향각을 지나 7층 석탑 앞에는 낙산사의 중심법당인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자리 잡고 있다.


원통보전에는 조선 시대 만들어진 건칠관음보살좌상(洛山寺乾漆觀音菩薩坐像)이 독존으로 모셔져 있다. 장지에 옻칠을 한 관음상은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얼굴 표정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지난번 화재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였다가 중건과 함께 다시 제자리에 봉안되었다.


원통보전 앞 정원에는 칠층석탑이 단아하게 서있다. 6·25동란이 남긴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탑은 원래 의상 스님이 3층으로 세운 탑을 세조의 낙산사 중건 명을 받은 학열 스님이 다시 쌓았다.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원장(垣墻)은 세조의 명으로 쌓은 담장이다. 이 원장은 황토와 진회색의 기와가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어 색조의 대비와 원통보전의 기품을 살려주는 아름다운 담장이다.




원통보전을 나와 해수관음보살상으로 가는 길목에 ‘꿈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표석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동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해수관음상이 기다리고 있다. 해수관음상은 16m 높이의 거대한 크기임에도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가 아름답게 이루어져 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고단함과 소원을 가장 먼저 듣고 현세에서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는 보살이다.

낙산사는 관음성지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절경으로 많은 화가,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다.


세조, 성종, 숙종과 같은 왕들은 물론 보우, 서산과 같은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낙산사를 안 다녀간 사람이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극, 정철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유자량, 이규보, 정추, 안축 등의 여러 유명한 문인들이 많은 시문을 남겼고,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남효온, 정사룡, 최립을 비롯하여 이민구, 윤증, 김창흡, 이해조 등이 낙산사를 탐방하고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1592년 임진왜란 피난 중에 부인이 첫 아들을 낳고 전란 통에 아내와 아들이 잇달아 죽는 불행을 당하자 이듬해부터 낙산사에 3년 정도 유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그해 10월 시화집 ‘학산초담’을 집필하고 다음해 과거에 급제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허균은 낙산사에 관한 3편의 시를 남겼다. 

낙산사를 소재로 그림을 그린 사람은 겸재 정선, 서암 김유성, 단원 김홍도 등이 대표적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은 낙산사에 들러 동해의 장엄한 일출을 보고 금강산 일대 ‘해악진경’여덟 폭을 병풍에 ‘낙산일출’ 이란 작품을 그려 넣었다.

또한 서암 김유성은 1764년 조선통신사를 수행, 일본을 방문하여 세이켄지에서 그려 준 ‘산수화조도 압회첩병풍’여섯 폭 중 네 번째로 보이는 그림이 ‘낙산사도’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원 김홍도 또한 1778년에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여행하면서 ‘낙산사도’를 그리게 된다.

단원의 ‘낙산사도’는 바다 쪽 하늘에서 낙산사를 내려다보는 조감도 형식으로 그렸기에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를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지난 산불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현재 보타전 앞에는 누각 형태의 보타락이 있으며, 그 앞에는 큰 연못이 있다. 보타전과 보타루를 지나면 동해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의상대와 홍련암으로 가는 길이다. 

의상스님이 좌선(坐禪) 수행을 한 곳으로 알려진 의상대. 세인들에게는 천하의 절경으로 일출을 맞이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의상대(義湘臺)는 18세기까지 존재했었으나 그 후 폐허가 되어 1925년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건의로 주지 김만옹(金晩翁) 스님이 정자를 새로 짓고 정식으로 의상대라 이름 붙였다. 




의상대 북쪽 300m 지점에 있는 홍련암(紅蓮庵)은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기 위해 기도하던 장소로 낙산사의 모태가 된 곳이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온 의상대사가 굴속으로 들어간 파랑새를 보고 그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紅蓮)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관음보살을 친견한 의상대사는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

지금의 홍련암은 1975년의 중창 때 지어졌으며, 안에 봉안된 탱화 역시 같은 해에 조성되었다. 법당 마루에는 8㎝의 정사각형 구멍이 나있다. 이 구멍을 통해서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10m의 낭떠러지 바위 틈새를 볼 수 있다. 이 바위 틈새는 관음굴이라고도 하는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거나 오체투지를 한 자세여야만 내려다 볼 수 있다. 범부의 눈에는 오직 바위 틈새로 파도소리를 내며 들락거리는 파도가 보일 뿐이다. 하지만 관음굴로 밀려오는 파도와 해조음조차 지극히 낮아지는 자세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다.  

낙산사를 나올때 본 무지개 모양의 석문 위에 누각을 세운 홍예문. 홍예문은 1467년(세조 13)에 세조가 낙산사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축조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낙산팔경의 그 첫 번째가 낙산사 홍예문의 동종에서 나오는 저녁 종소리였다. 그만큼 아름다운 소리로 삼라만상을 깨웠던 동종이다. 

낙산사를 나오는 오후. 이 동종의 소리까지 들었다면 낙산의 아름다움을 오감으로 만끽할 수 있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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