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츠] 짧은 황홀 긴 여운, 지리산의 가을
Punctum | 2012.02.13 | 추천 : 2824 | 조회 30737



가을에는 산이 아프다. 짧은 절정기 동안 쏟아지는 수많은 사랑과 환호에 시달려 산 전체가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가을산의 단풍이 울긋불긋해질수록 그게 점점 짙어지는 멍처럼 보여 되려 미안할 때도 있다. 제 몸을 태울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가을은 늘 그렇듯 불꽃처럼 피었다가 쏜살같이 사라진다. 이 짧은 황홀을 놓칠세라 심야 막차를 타고 간다. 지리산으로...



백무동~장터목~천왕봉 또는 중산리~장터목~백무동 코스는 지리산을 가장 짧고 근성있게 품는 길이다. 무박2일 한정된 시간 안에 다녀오려면 바로 치고 올라가는 코스가 낫다. 현재까지는 이 코스가 천왕봉까지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이다. 대신 경사가 심하고 길이 험하다. 물론 장터목대피소에서 1박을 겸한다면야 코스가 다채로워지겠지만 가을 성수기 주말에 장터목대피소 예약을 따내기란 언감생심. 마음을 비우고 허벅지를 단련하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남 함양군 백무동까지 들어가는 고속버스가 운행중이다. 백무동 탐방지원센터 바로 앞에서 하차한다. 거기서부터 천왕봉을 거쳐 다시 중산리로 내려오는 약 12km 코스가 가능하다. 긴 거리인데다 계단 천지의 하산길이 만만찮아 여유 있게 8시간은 잡아야 한다. 무박 2일의 일정이면 새벽 12시 출발하는 차량을 이용하자. 백무동에 도착하면 새벽 3시 30분. 주변에 문을 연 상가가 없어 간식, 음료수는 사전에 모두 챙겨야 한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지리산(백무동)으로 가는 버스가 심야까지 있다 (사진 위/좌). 장터목까지 가는 길에 있는 유일한 식수원인 참샘. 물맛이 기가 막히다 (사진 위/우). 슬며시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지리산의 단풍. 이제 시작이다. (사진 아래)

백무동으로 가는 심야고속 안에서는 미리 눈을 붙여두려는 사람 반, 슬며시 소주와 쥐포 따위를 꺼내 홀짝거리는 패거리가 반이다. 서로 처음 봤지만 좌석 앞뒤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모두 친구가 되고 이모가 되고 삼촌이 된다. 산을 타면 이런 살가운 잔재미가 무궁무진하다. 몸은 피곤한데 눈은 감기지 않는 어중간한 상황. 겨우 잠이 들었나 싶은데 이내 백무동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사방이 칠흑처럼 시커멓다. 랜턴은 필수다. 백무동 탐방지원센터에서 참샘까지 가는 길은 바위길이 많아 발 밑을 항시 조심해야 한다. 참샘까지는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랜턴빛에 비치는 앞사람의 엉덩이만 바라보며 한참을 걷는다. 사방이 고요한 숲 속에 때아닌 산객들의 거친 숨소리만 요란하다. 길을 잃으면 어쩔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동바위~참샘~소지봉을 지나 장터목까지 올라간다.

소지봉을 지나자 하늘에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감돌기 시작한다. 고된 오름길도 능선에 접어들면서 유순해졌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가 다 되어간다. 희부윰한 빛 속에서도 여름내 참았던 울긋불긋 단풍이 터진 곳들이 보인다. 가을산이 비로소 초경(初經)을 시작했다. 곧이어 산 전체를 휘감으며 들큼한 피냄새로 들끓게 할 것이다.



1년 내내 산꾼들이 묵어가는 장터목대피소. 그 옛날 이 곳까지 어떻게 올라와 장이 열렸을까 (사진 위/좌). 제석봉의 화사목은 인간의 탐욕이 말살시킨 자연의 처참한 상흔이다 (사진 아래/좌). 천왕봉으로 가는 통천문 구간. 이곳을 지나는데 속세의 체면이나 지위 따윈 필요 없다. 누구나 헐떡대며 차례대로 지나간다. (사진 아래/우)

아침 6시 30분. 아침 안개가 자욱한 장터목 대피소는 다들 안개 때문에 일출을 포기하고 잠들어버린 듯 특유의 부산함 없이 조용하다. 이 틈에 잠시 쉬며 주린 배도 채운다. 휴대용 버너를 갖고 올걸 그랬나 보다. 고도가 높은 탓에 날이 생각보다 쌀쌀해 따끈한 국물생각이 절로 난다. 그러나 현실은 다 식어빠진 샌드위치가 전부. 이거라도 먹어야 또 기운 내서 제석봉을 오를 수 있다. 깔깔한 입에 넣고 씹으려니 모래처럼 서걱거리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장터목을 지나면 바로 제석봉이다. 이 곳에 얽힌 뒷얘기는 슬프다기 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제석봉의 고사목 군락은 사실 화사목(火死木)이다. 불에 타서 죽은 나무라는 뜻이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때 농림부장관의 친척이 제석봉 일대의 아름드리 나무들을 몰래 벌목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휑한 모양이 됐지만 원래 제석봉은 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숲이 울창했다고 한다. 이제는 자료사진으로밖에 남지 않은 풍경이다.

여태 안개가 자욱한 제석봉을 꾸역꾸역 올라 통천문을 지난다. 세상 누구라도 이 곳을 거치지 않고선 천왕봉에 오를 수 없다. 통천문은 산에서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다 평등하다, 는 식상한 진리를 재확인시켜준다. 신새벽부터 출발한데다 부실한 먹거리 때문에 슬슬 연료등에 불이 들어오려고 하는데 마침내 천왕봉(1,915m)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 드디어 올랐구나!


 
천왕봉 주변의 단풍은 그야말로 가을날의 맛보는 최고의 황홀. 할 말을 잃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사진 위). 구름과 안개가 골을 부리며 장엄한 산세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운치가 되고 풍경이 된다 (사진 아래)

비록 기대했던 장대한 남도의 산세는 안개 때문에 보지 못했지만, 천왕봉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로 마음이 벅차 오른다. 보여줄 듯 말 듯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들과 숨바꼭질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이정도 수고는 기꺼이 해줄 만 하다. 그래도 사고 없이 여기까지 오른 게 어디란 말인가.

천왕봉에서 내림길로 선택한 코스는 중산리 방향이다. 남강의 발원지 천왕샘을 지나 개선문~법계사~로터리산장을 거쳐 중산리 야영장으로 내려간다. 초반부터 심한 급경사 너덜길이라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초반의 너덜길 구간은 애교 수준. 이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계단이 순차적으로 나타나 당신의 무릎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괴롭히게 된다. 울고 불고 짜도 소용없다.

개선문에서 법계사까지 오는 길의 단풍과 드문드문 보이는 그림 같은 산세가 가만히 서있어도 덜덜 떨리는 무릎으로도 자리를 못 뜨고 계속 보고 만든다. 이걸 보기 위해 다들 이 고생들이구나. 이 찰나의 황홀경에 반해 그저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분만실 밖의 더벅머리 사내처럼 전전긍긍하는구나. 그들의 조바심이 얼마나 오랜 기다림을 담보로 한 것인지 이제야 알겠다.


 
가을을 맞아 전국의 산꾼들이 로터리대피소에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 위/좌). 끝없는 계단지옥 중산리 내림길. 굳이 이렇게까지 계단을 많이 설치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진 아래/좌). 중산리 버스정류장에서 시외버스가 1시간 마다 있다 (사진 아래/우)

중산리 야영장까지 오면 그제서야 살았다는 긴 한숨이 나온다. 중산리탐방지원센터가 지척이고 거기서 다시 1.7km 정도를 걸어 내려가면 시외버스정류장이 나온다. 1시간마다 버스가 있으며 원지행과 진주행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일단 진주로 가서 잠시 쉬었다가 우등고속을 타고 다시 서울로 이동하기로 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들어버린 두 남자. 꿈에서조차 계단 위에서 단풍을 보았다. 긴 하루였다.

Tip 1) 무박2일 일정이라면 무겁더라도 휴대용 가스버너와 코펠 하나 챙겨가기를 권한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차갑게 식은 빵을 먹는 것과 라면이라도 뜨거운 국물을 섭취하는 것과는 천양지차. 단, 취사가 허가된 장소에서만 사용해야 한다.

Tip 2) 중산리에서 원지정류소로 가서 거기서 다시 서울로 가는 방법 보단 조금 더디더라도 진주까지 나가서 다시 터미널로 이동하는 편이 조금 더 수월하다. 일단 시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배차도 넉넉히 잡혀있어 부담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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